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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이해하는 우리의 역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표가 됩니다
1957년 이후 1966년까지 10년간은 한국 석탄산업의 최고 황금기였다. 탄광개발이 활성화되어 탄광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고속성장을 거듭하였다. 수요 또한 증가하여 시장 규모는 매년 확대되었다. 발전소 등 산업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가정을 상대로한 민수용 수요까지 급증하여 석탄증산에 따른 수요창출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었다. 정부는 '석탄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석공법 개정, '광업법' 제정 등 적극적인 석탄증산정책 하에서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증산을 지원했다. 그러나 증산보국의 석탄산업에도 복병이 있었다. 수요의 증가에 따른 공급체계의 지속적인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10월 이른바 '연탄파동'으로 정부의 연료정책이 유류 위주로 급선회하면서 석탄산업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70년대 전반기의 석탄산업
1970년대 전반기의 석탄산업
1970년대 전반기는 「석탄광업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 의 시행에 따라서 탄광업계의 개발의욕은 고무되었고 또 정부의 보조금정잭이 가시적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73년도의 「석유파동」 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이 파동의 직접적인 충격파는 국내 탄광업계의 발전에 호재로 작용함으로써 석탄의 생산은 매년 증대 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화된 호재와는 반대로 업계가 겪은 내부적인 시련도 결코무시할 수가 없었다. 즉 ’71년과 ’72년의 양년도의 연탄성수기인 겨울철 기온이 상승한 이상 기후현상이 계속되어 연탄의 소비부진으로 이어져 석탄이 과잉저탄이 되었고, 이로 인한 거래조건의 악화도 겹쳐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다. 여기에 다가 ’72년 8월 19일에 전국을 강타한 폭우로 강원도로 대표되는 탄광지대 또한극심한 수해를 입게 되었다. 예컨대 이 폭우로 인해 영월읍의 철도교량이 유실되어 이것이 복구되기까지 50여일 동안 영동선이 불통되는 초유의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동 철도로 무연탄을 수송하는 관련 탄광들은 저탄이 넘쳐서 일부 생산을 감축하는 등 운영난을 가중시켰다.
또한 대부분의 탄광들은 저탄과 도로의 유실 갱도침수 등으로 막심한 손해를 보았고, 이것을 복구하기 위하여 생산외적인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는가하면, 생산중단 등으로 자금 확보에도 어려움에 처했다. 이와 함께 공교롭게도 ’73년도에 는 석탄가격의 인상이 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탄광업계에 큰 타격을 미쳤다. 그러나 ’73년 10월부터 시작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폭등함에 따라 다읍해인 ’74년도에 가서 탄가인상폭이 전년도 가격과 대비해서 513%로 대폭 인상되므로 탄광의 어려운 경영 상황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갱목의 공급난이 심화되어 전 탄광의 처목량이 평균 한 달 사용량 정도 밖에 확보가 안 된 상태로 갱목품귀현상이 발생함으로 가격폭등으로 이어졌고, 탄광업계는 악전고투의 시기였다. 그 원인을 제도적으로 살펴보면 산림청이 농수산부(현 농림부)으로부터 내무부(현 행자부)로 이관됨과 아울러 새로운 치산녹화107H년 계획을 수립하여 임목벌채를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항은 「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 이 ’70년도부터 시행되어 석탄광업의 발전에 획기적인 신기원을 창출했다는 사실이다. 동 법은 주로 민영탄광에 대한 생산비 보조적인 내용과 수송비의 보조, 그리고 시설자본재에 대한 보조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 보조급의 교부재원 조달을 동법에 명시함으로써 탄광업자가 안심하고 장기개발계획을 수립하여 투자하는 기업풍토가 조성됨에 따라 석탄생산기반의 확립과 확충을 통해서 생산을 극대화되었다.
물론, 이 금액이 모두 탄광업자에 대한 생산비보조에 교부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석탄광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있어서 직 · 간접적으로 투입된 만큼 전체적으로 그만큼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육성자금은 석탄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석탄산업의 부흥과 쇠퇴는 때로는 국내의 경제여건의 변동이나 정부정책 의도 와는 관계없는 외부요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는 단적인 실례가 ’73년 10월 6일에 돌발한 중동전쟁으로 인한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가 장기간에 걸쳐 오일쇼크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경제가 불황에 빠져버린 일이라하겠다. 이에 따라 석유자원을 갖지 못한 국가들은 서둘러 석탄이나 대체에너지원개발로 에너지공급원을 다양화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현상을 몰고 왔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무연탄은 국내에 부존하는 유일한 에너지차원이라는 점과 노동집약산업으로서 고용효과가 매우 크며, 유류수입을 대체하여 외화절약에도 기여한다는 등 다목적효과에 대한 인식과 가치의 재발견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74년 12월 18일에 재단법인 석탄장학금(가칭)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정관과 임원진 선출을 마치고 발족하게 되었다. 장학회의 기금은 각 탄광이 생산량에 따라 톤당 25원을 출연하기로 결정하고서 ’74년도 생산량 분부터 추렴하였다. 장학곰의 지급은 ’7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업계의출연 부담은 그 후 톤당 40원으로, 또 50원으로 인상되었다. 장학기금의 출연은 정부에서도 목표액의 50%를 부담했고 또 장학금의 지급에도 정부보조금을 출연하여 충당하였다
나아가 정부는 ’75년 3월 29일 법률 제2746호로 「석 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 을 공포 시행하였는데, 동법은 ’78년 12월 5일차 법률 제3124호로 유효기간이 ’86년 12월 31일까지로 연장되었다.
우리나라의 석탄산업은 외관상으로는 이와 같이 정부의 두터운 보조금혜택을 받고서 생산량이 증가되고 또 석유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석탄가격이 제도적으로 억제당하고 작업막장의 심부화 등으로 원가상승이 겹쳐서 채산성이 날로 악화되어갔다.